거칠게 풀어헤쳐져 앞섬을 내보여주는 웃옷 아래로 폭이 넓은 바지. 그 특이한 복장은 단 한 번 보았음에도 쉬이 잊혀지지 않았기에 곧장 한 남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 내 생각이 맞았다는 듯, 새파란 머리카락과 꼭 닮은 그의 눈길이 이쪽으로 닿는다.
그리고 내뱉어지는 퉁명스러운 목소리. "바보냐, 여자. 눈은 왜 감고 있어?" (......) "그만한 영압에 맛있는 냄새까지 나니까 호로들이 미친듯이 달려드는 거 아니겠냐. 너, 조심 좀 하지 그래?"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보듯 시선을 던지는 그를 마주보다 이내 천천히 들어오는 광경에 놀라 주변을 살폈다. 방금까지 공격해 오던 정체 모를 괴물의 시체와 괴물의 것으로 보이는, 여기저기 사방으로 널부러져 갈기갈기 찢겨져 흩날리고 있는 살점들. 형체는 물론이거니와 그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에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애써 억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파르르 떨리는 어깨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새파랗게 질렸을 입술을 살살 깨물고 있자니, 그가 다가오려던 걸음을 멈춘다. "...아아, 그건가. 잠시 눈 감고 있어라." 이런 상황도 충분히 예측했다는 듯, 별로 당황하지 않고 덤덤히 말을 내뱉던 그의 손이 내 눈가에 덮혔다. 순식간에 빛과 차단된 그 시야 너머로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세로." 그 말이 끝나자마자 콰앙, 하는 엄청난 파공음 소리가 귀를 울렸다. ".......됐어.눈 떠." 얼얼해진 고막보다도, 그가 손을 거두는 느낌이 아쉬워 천천히 눈을 떴다. 확실히 조금 전 보다 나아진 광경이었다. 비록 학교의 일부분은 날아갔을지라도 그 징그러운 시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소멸한 것 같았다. ...... ......... 잠깐, 학교가 날아가? (?! 하, 학교가 날아갔잖아요!) "? 뭐 어때.건물 하나 날아간 거 뿐이잖냐." (거,건물 하나?) "영압으로 인해 손실된 거니까 나중에 원상태로 복귀 가능하다. 뭐, 이 근방 사신들이 알아서 하겠지. 무엇보다 이 교실이 날아간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여자, 너 하나다. 넌 영압을 느낄 수 있으니....." 여전히 별 표정 변화 없이 설명 해주는 그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 무, 무슨 소리야? 귀신이라 이런 식의 능력이 있는 건가? 하지만 이건 초능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머리를 감싸쥐고 생각이란 것을 나름 열심히 해보아도 결국 내려지는 결론은 애초에 이런 일을 하고도 태연하다는 것 자체가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야, 여자. 뭐 할말없냐?" 단순하게 내려진 결론에 스스로 납득하며 흘끔흘끔 눈 앞의 남자를 훔쳐보고 있었던지라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더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간신히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천천히 뒤로 향하자 그가 다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이 남자가(일단은) 목숨을 구해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 그러나 그게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는 듯 그의 미간이 한없이 찌푸려졌다. 본디 무서워 보이던 얼굴인지라 제법 험악하게 미간을 구기니 그야말로 인상이 최저를 달리고 있었다. "......그거 말고." (...?) "됐어.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이람. 아이젠 녀석도 여자를 구하라는 말은 없었는데." 그러나 결국 포기했다는 듯 잠시 자리에서 툴툴거리던 그가 다시 어디론가 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나는 그런 그를 멍하니 보기만 하다가 어쩐지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다급히 그를 붙잡고 외쳤던 것 같다. (저, 저기요!) 막 발길을 돌리려던 그가 멈칫 하더니 이내 이쪽을 돌아보았다. 저를 불러 세운 것이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다, 다시 만나 수 있나요?) "....... 아아. 걱정마라. 나 역시 네게 원하는 것이 있고, 알아내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그게 풀릴때까지는 네 곁에 있을거다." 다급히 이어지는 내 말에 그냥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던 그가 천천히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그런 멍한 표정 짓지 말고, 웃어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