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죠는 어차피 라스노체스에 있고, 웨코문드에 있으니까.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소개팅을 나가 유독 잘 맞았던 다른 남자 한명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 남자와의 연락이 중간에 끊겨 의아한 마음으로 그의 집으로 향했다. 어쨌거나 친분이 제법 쌓여있었기도 했고, 집에 계속 있다가는 그림죠와 대면해야 할 것만 같아서 였다. 그렇게 골목길을 도는 순간이었다. (......아.) 순간 다리에서 저절로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비까지 추적스레 내리고 있던 탓에 새로 꺼내 입었던 옷이 금새 바닥의 흙탕물에 물들어 젖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건만, 그것에는 미처 생각도 못미칠 정도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그 광경은 차라리 꿈이길 바랄정도로 모든 상식을 철저하게 부숴버리고 있었기에. 코끝이 찡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독한 피내음과 골목길쪽으로 길게 늘어진 혈흔 자국들. 제 의지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는 듯, 사방에 절박하게 흩뿌려진 그 피들은 내리는 비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인함인지 아직 굳지 않고 생생하게 빗물과 섞여 바닥으로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돼지를, 소를 해체하는 작업의 현장이 이러할까? 흡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잔혹한 사건의 현장마냥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는, 한때는 사람의 살점이라 불렸을 고깃덩이들이 붉은 액체들과 뒤엉켜 눈에 선명히도 들어왔다. 당한 부위가 어디인지 짐작도 못할 정도로 잔뜩 난도질 당한 일부가 이곳에 점점이 널려있었다. 피웅덩이에 잠겨, 혹은 빗물에 씻겨 내려가 원색을 드러내고 있는 그 일부들은 분명 소나 돼지 따위의 내장이 아니었다. 나오는 토악질을 간신히 삼키며 골목길 안으로 비틀비틀 들어섰다. 더욱 진해진 쇠내음과도 같은 피냄새와 그 절정을 맞이하는 순간이라는 듯, 온통 붉게 점칠되어 버린 골목 안에는 불과 얼마전까지 사람이라 여길 수 있었던 한 구의 고깃덩이가 볼썽사납게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 그리고 그 시체 위에 앉아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낯익은 하늘빛 눈동자. "여어. 오랜만이지? ." 그 기괴하고도 현실감 없는 무시무시한 장면에 저도 모르게 천천히 뒤로 물러서다가 문득, 방금까지 시야에 선명히 들어오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벼운 어조로 말을 건넨 것과 달리 푸른 안광을 형형이 빛내며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씹어 먹을 듯 살기를 내비치고 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머리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이 기억은, 지워야겠지. 네가 기억해 낸다면 또 떠나려 할 테니까. ...그건 안되잖아? 그러니 얼마든지, 질릴때까지 이런식으로 굴어도 좋아. 그럼 나는 네 상대를 죽이고 또 죽여서....... 결국 주변에 아무도 없어진 너를 다시 끌고 올테니." 희미한 그의 속삭임에 실린 번들거리는 무언가를 느끼기에는, 모든것이 너무 늦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