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유치한 이야기를 들으렴,
상냥한 손을 건네 어릴 적 꿈에 뒤죽박죽인 이야기를 놓아 두렴 기억나는 신화들의 묶음 속에, 필그림의 시든 꽃다발 같이 아주 먼 곳에서 뽑아온 것 말이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서문 中- 일 년에 한 번 뿐인 그의 생일 아침부터, 이쪽은 정신없이 바빴다. 일찍 새벽부터 일어나 케이크를 굽고, 준비해둔 선물을 미리 포장하면서 지금쯤 웨코문드에 있을 그를 떠올리며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던 보람이 있던 것인지, 조금 늦은 아침이 올 때쯤에는 모두 준비가 끝났다. 어디까지나 몰래 준비하는 생일파티였기에 오늘 웨코문드로 데려다 주는 것은 그림죠가 아닌 우라하라 씨다. "딱 맞춰 오셨네요, 님." 평소처럼 나막신 모자를 쓴 채, 품이 넓은 옷을 입고 느긋한 한량마냥 웃고 있는 얼굴의 그가 상냥하게도 문앞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그런 그의 뒤를 쫓아, 상점에 숨겨진 지하 공간으로 나오자 그가 미리 열어놓은 가르간타가 보였다. "자, 그럼 손을." 먼저 들어간 그가 익살스럽게 손을 내밀고, 그런 그의 손을 잡고 가르간타로 들어온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우라하라 씨가 만드는 반듯한 영자의 발판을 따라 움직이길 몇 분이나 흘렀을까. 예의 마이페이스로 유명한 우라하라 씨의 얼굴에 드물게 당황스러운 기색이 엿보이는가 싶었다. 그리고. " 님! 오지 마세요!" 돌연 그가 큰소리로 내지르며 발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본다. 그것에 의아해 하면서 상황을 묻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몸이 휘청였다.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며 밑을 보자, 영자의 발판 아래로 무언가가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점차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머릿속을 한가득 채우는 의문에 상황은 친절히 답을 주고자 했던 것일까, 단단히 발밑을 지지해주던 우라하라 씨의 발판이 한순간 깨지면서 그대로 영자들이 소용돌이 치는 아래에 몸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 님───!!!" 반박자의 아주 미세한 시간 차이로 그가 필사적으로 뻗었던 손은 아슬아슬하게 내 손가락을 스쳤다. 한순간 우라하라 씨의 얼굴에 번지는 경악을 마지막으로 시야는 새까만 영자들의 난기류로 인해 더 이상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 일어난 곳은, 분명 익숙한 곳이었다. 새하얀 모래가 곱게 펼쳐진 넓은 사막과 그 위로 변함없이 떠있는 밝은 달. 날카로운 석영의 나뭇가지. 동족의 뼛가루로 만들어진 그 모래 아래로 뽈뽈 기어다니는 작은 호로들. ...웨코문드다. 중간에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그것이 그렇게 큰 문제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면 다른 에스파다가 마중나와 줄 때까지는 무슨일이 있어도 곁을 지켜주던 우라하라 씨가 보이지 않다는 것일까. 역시 아까 그 때 떨어져 버린 것 같았지만, 곧 그 추측은 잠시 접어두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정말 그렇게 된 것이라면 영자의 소용돌이 아래로 추락해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이쪽이 지금 웨코문드에 멀쩡히 있을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그 아래로 떨어진 사례는 들은 적이 없기에 지금처럼 단순히 어떤 일도 없이 멀쩡하다던가, 아니면 정말 심각한 상황에 이루어 몸이 산산조각이라도 난다던가- 같은 일들이 일어나도 하등 기이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단순하게 추락한 상황이 아닌 무언가 이질적인- 그 우라하라 씨조차 놀라던 검은 소용돌이에 휘말려 떨어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단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다면 우라하라 씨든 누구든 곧 올 것이라는 희미한 기대감을 품고 부드럽게 흩날리는 모래 위에 앉았다. 옆에는 열과 성을 다해 만든 케이크 상자와 선물이 그나마 곱게도 놓여 있었기에 안심하며 그것들을 챙긴 채 서늘한 웨코문드의 모래바람을 피해 조금 큰 석양 나무 근처에 앉았다. 조금 기다렸다가 역시 오지 않으신다면 혼자서 라스노체스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케이크 상자를 집어 든 순간, 몸 위로 무언가 흘러내리는 느낌과 더불어 무엇인지 모를 위화감이 몰려들었다. (.......어?) 분명 어디 한군데 잘못된 것도 특별히 아프거나 몸이 이상하다는 감각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짙게 몰려드는 알 수 없는 어긋남에 다시 천천히 주변을 살피다가─ 몸을 내려다 보았다. (.......!!!) 순간 정말 두 눈을 의심했다. 혹시 기절해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와 같은 황망한 생각이 들 정도로 이쪽을 몰아붙인 현재의 상황은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몸이 작아져 있었다. 아무리 많이 쳐줘도 열 살 전후로밖에 안보이는 자그만 몸집에 짧고 통통한 손가락에 만져지는 오동통한 볼살은 아무리 다른 상황을 가정해도 분명 '어려졌다.' 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덕분에 입고 있었던 원피스가 어깨 아래로 축 흘러내리는 것에 기함을 하며 어떻게든 끌어올렸지만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무릎 위까지 오던 원피스가 바닥에 깔리고, 어깨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너무나 맞지 않아 쭉쭉 흘러내리는 것에 다급히 남는 소매들과 치맛지락을 이용해 그런대로 둘러매듯 칭칭 감고 또 걸쳐야만 했다. 그럼에도 어지간히 볼썽사납게 커진 옷지락을 붙잡으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진다는 말을 몸소 체감했다. 이게 무슨, 이라고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가 황급히 다시 닫았다. 어려졌다 라는 단어에 대한 확신을 박아버린 것은 아이들이 낼 법한 작고 높은 목소리였다. 조금씩 황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막 걸음을 떼려던 순간, 근처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 그림죠.] [뻔한 걸 묻지마, 일폴트. 위로 올라가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녀석들을 해치워야겠지.]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들이었으며 동시에 문제가 생긴 지금, 가장 듣고 싶었던 이름들이 문장과 섞여 흐른다. 그걸 깨달은 동시에 머릿속은 그 이상의 사고를 멈추고 느리던 행동은 이성보다 먼저 튀어나갔다. ──그것은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실수였다. (그림죠.......!) [뭐?] 활짝 웃는 얼굴로 보폭이 짧아진 다리에 온 힘을 주어 목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들었다. 작아진 만큼 보폭이 줄어들어 바로 근처의 거리임에도 열심히 모래 위로 뜀박질을 해야 했다. 마구잡이로 뛴 탓에 들고 있던 상자들은 가차없이 흔들리고 쏠려버렸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쪽의 목소리에 제일 먼저 반응하는 친숙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앞으로 일어날 상황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나는 한순간 무언가에 의해 데롱데롱 들려졌다. [........인간?] 당혹스러운 심정을 그대로 내비치는 의문이 가까이에서 귓전을 때렸다. 예상을 빗나가는 반응에 놀라 그제서야 주변을 휘휘 돌아보자, 잘못되도 한참 잘못됐다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모른다. 전혀 모르는 생면부지의 호로들이다. 심지어 착각한 것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그나 다른 이들과 다르게 '인간형' 은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었다. 오히려 예전부터 이쪽을 죽어라 쫓아다녔던 '괴물'들의 외향과 흡사한 그 모습에 놀라 절로 입이 꾹 다물어졌다. 본능적으로 도망가야 할 것 같아 두 다리를 움직여봐도, 이쪽을 낚아채 꼬리로 돌돌 말고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거대한 호로에게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역삼각형에 가까운 커다란 머리 한쪽에 붕대 비슷한 것을 둘둘 말고 있는 이 호로는 한참이나 이쪽을 이모저모 뜯어보다 고개를 갸웃였다. [뭐야, 진짜 인간인데? 사신의 영압 따위가 아니야. 게다가 이거 어린 것 같은데?] [대체 왜 새끼 인간이 웨코문드에서 돌아다니고 있는거야?] [무슨....... 사신도 아닌 인간이 가르간타를 통과해 들어온 기록은 한번도 없어. 게다가 이런 어린아이 혼자라면 더더욱.] 이쪽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것은 이 호로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당혹스러운 어조, 놀란 어조, 미세한 경계심과 다분한 호기심등이 한데 섞여 오롯이 꽃히는 것에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근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는 아까부터 대체 어디서 나고 있는 거야?] 문득, 누군가의 말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등골이 서늘했다. 익숙한 한기와 상반대는 미열이 몸을 타고 들며 식은땀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안색을 들어 까마득하게 커다란 '괴물들' 을 바라보자,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불길한 시선을 띄우며 이쪽을 한데 응시하고 있었다. 내 몸을 아직도 꼬리로 한참 휘감고 있던 호로가 불쑥 입맛을 다신다. 그리고는 왁, 입을 크게 벌리는 시늉을 하며 낄낄 웃었다. [여기잖아, 여기! 한입도 안되서 아쉽긴 하지만, 정말 맛있는 냄새가 나잖아! 이대로 꿀꺽 먹어버릴........] 그리고 그쯤에서 이쪽의 정신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너무 짧은 시간동안 벌어진 어마어마한 사건은 간신히 버티고 있던 상태를 빠르게 무너트렸다. 거기에다 몸만 아이가 되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여느 때와 같은 반응으로 초연히 있을 수가 없었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고, 코끝이 톡톡 튀며 찡해지는 가 싶더니-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와앙, 크게 울음이 터졌다. 엄마, 아빠아───. 분명 초등학교 입학한 이후로 목놓아 울어본적이 거의 없는데, 아예 어린애처럼(물론 지금 모습은 어린아이가 맞았지만.) 펑펑 눈물샘을 터트리며 우는 이쪽의 모습에 스스로도 그렇지만, 가장 많이 놀란 것은 이 호로들이었다. [뭐, 뭐, 뭐, 뭐야! 쪼끄만게 뭐가 이리 시끄러워?!] [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놀려대다 이 사단을 만드냐, 디로이. .......뭐해?! 빨리 죽여!] 뜨악한 말투로 당황한 듯, 꼬리를 경직시키는 호로의 모습에 소와 같은 형태를 한 호로 하나가 매섭게 일갈한다. 그 사이로 어딘가 너무나 친숙한 단어 하나가 더 튀어나온 것에 나는 순간 울음을 멈췄다. ──디로이? 웅얼웅얼거리는 목소리는 그새 잔뜩 잠겨 있었지만, 그렇다 해서 일반 사람들의 청각과는 비교도 안되는 그들의 귀를 빗겨나갈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익숙한 이름을 확인 삼아 다시 부르자, 꼬리로 이쪽을 돌돌 말고 있던 호로가 머리를 기웃였다. [그거 내 이름인데. ......뭐야, 꼬맹아. 이제 우는 건 멈춘거야?] [뭘 또 대화를 하고 있어. 그러든말든 어차피 죽여야 하잖아. 빨리 해.] [일폴트, 너 아까부터 나한테 명령을.......] 또다. 익숙한 이름들이 연달아 나오는 것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선을 옮겼다. 디로이, 일폴트. 그리고. [그림죠. 어쩔거야? 네가 먹을래?] [지금은 별로 생각없어.] 건네진 문장 속에 지독하게 선명히 들려오는 그의 이름에 몸을 굳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그 방향을 살폈다. ......이곳에서 제일 작은, 그리고 유난히 '동물' 의 모습을 띄고 있는 새하얀 표범이 나른하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항상 이쪽을 마주보며 시원스레 웃던 그 새파란 눈동자와 지금 저 표범의 눈은 황당하게도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림죠?" 특유 목소리도, 말투도 어느것 하나 온전히 그만의 것이었지만, 외양은 다르다 못해 종 하나를 뛰어넘어 버린 '그' 를 바라보며 언젠가 일폴트가 이야기 해주었던 그의 아쥬커스 시절을 떠올렸다. ...분명, 다른 호로들에 비해 작고 새하얀 표범의 형태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 눈앞의 표범이 그인걸까? 갑작스레 떨어진 이곳에서 내 모습까지 어려진 것도 지금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의 아쥬커스 시절이라면 대체 몇년, 몇십년, 어쩌면 그 이상으로 되감아진 곳인걸까.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오싹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은 정말이지 말도 되지 않는 현상을 연이어 불러오고 있었다. 채 따라갈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 덕에 머리는 새하얗게 백지가 되어 버렸고, 그 덕분에 일순 사나워진 호로들의 눈짓 섞인 신호를 미처 보지 못했다. 이후 소리도 없이,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들 중 하나가 내지른 공격이 나를 때렸다. 정확히는 그러려 했다는 설명이 맞을 것이다. 몸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자신만만하게 이쪽을 향해 너무나 가벼운 몸짓으로 숨을 끊을 공격을 감행했던 꽃잎마냥 얼굴에 무언가를 잔뜩 두르고 있던 그 호로는 눈을 깜박이는 사이 사라졌다. 좀 더 문장을 덧붙이자면, 그가 날린 손이 이쪽에 닿는 그 순간 그 호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순간에 터져버렸다. 조금의 살점도 남기지 못한 채 그야말로 낱낱이, 그건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뭐......!] [디로이, 그 인간을 내려놔!] 놀란 것은 호로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쪽도 뒤를 돌아보자 어느 순간 호로 하나가 온전히 사라져 버린 것에 충분히 경악하고 있었다. 풍선이 터졌다는 비유보다는 너무나 작은 단위로 곱게 분해가 되어 없어졌다는 쪽이 더 어울렸다. 그리고 그 낯설지 않은 힘을 보면서 누군가가 떠올랐다. ───스타크. 최근, 이곳 웨코문드에서 돌아다니다 호로의 습격을 받은 전적에 내심 신경쓰고 있던 것인지 그는 릴리넷도 놀랄 정도로 '귀찮음을 무릅쓰고' 친히 자엘아폴로에게로 가서 이쪽의 호신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기행을 들은 일부 에스파다들마저 너도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자엘아폴로에게 협박을, 혹은 같은 부탁을 남겼던 것이다. 물론 자엘아폴로도 마음 속으로는 그런 모두의 의견과 아주 틀리지는 않았던 것일까, 반나절만에 그는 스타크와 다른 모두의 힘이 일부 담긴 호신용을 완성시켜 이쪽에 건네주었다. 정확히는 이식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다른이들의 영압을 밖으로 가지고 다니다 뺏기는 쪽이 위험하다면서, 이쪽이 더 확실하다는 말과 함께 그는 몸에 무언가를 새겨주었다. "이 웨코문드에서 널 모르는 호로들은 멍청하고 아둔한 길리안 밖에 없겠지. 혹은 그만큼의 지능밖에 안되는 아쥬커스나 바스트로데라던가. .......이건 그런 놈들을 막기 위해 만든거야. 말하자면 마킹용인 셈이지. 평소에는 상관없지만, 살의를 가지고 네게 접근하는 호로들에게 반응해 호신용으로서 가치를 다할거다. 에스파다 정도는 되어야 쳐낼 수 있겠지만... 여기서 널 공격할 에스파다는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제 안경을 고쳐쓰는 자엘아폴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자 그는 픽, 웃으며 다른 녀석들에게도 가보란 말을 했었다. 생각보다 많은 영압을 넘겨준 그들 덕분에 훨씬 수월했다는 말과 함께. ─그때는 와닿지 못했지만, 지금- 이 웨코문드에서 강함이라면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힘을 가진 에스파다들의 영압과 이곳에서 전대미문한 과학자나 다름없는 자엘아폴로의 연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대체 인간이 어떻게 저런 힘을.......] [그것보다, 방금 그건 우리 같은 호로의 영압이었잖아! 그것도 단순한게 아니야, 우리 이상, 최소 바스트로데 급 영압이었다. 인간 따위가 어떻게 동족의, 그것도 한참 상위급 개체들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냐.] [저런 힘이 있다면 왜 처음 잡혔을 때 반응하지 않은건데? 나한테 잡혔을 때는 얌전했잖아. ...좀 울긴 했지만.] 털썩, 모래 위로 이쪽을 내려놓은 그들은 여전히 이해 범위 밖이라는 기색으로 한참을 떠들고 있었다. 중간 중간 이제는 익숙해진 음성이 들려오는 것에 슬그머니 시선을 올려 소를 닮은 호로와 역삼각형의 머리를 한 호로를 바라보았다. ......일폴트와 디로이. 믿기 힘들었지만, 역시 그들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그거야 모르지. 어쨌거나 이래가지곤 죽이려다 우리가 죽을 수도 있겠어.] [못본척 하자는 소리야? 그렇지만 이곳에 인간.......] [몰라. 어차피 뭐가 뭔지도 모르는 것 같은데, 저대로 놔두면 굶어죽거나 지쳐서 죽겠지, 뭐.] [그렇긴 한데.......] 먼저 몸을 돌리는 일폴트와 영 찝찝하다는 듯 이쪽을 흘끔이며 보는 디로이를 보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기서 낙오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곳은 호로들이 사는 공간이다. 그렇다는 건 인간들을 위한 것이 어느것 하나 없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정말 과거에 있다는 말도 안되는 일이 정말이라면, 우라하라 씨든 누구든 당장은 찾아오기 힘들 것이란 사실이 피부 위로 와닿았다. 물론 우라하라 씨가 이 상황에서 이쪽을 찾지 못한다는 가설보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데리러 올 것이라는 증거 없는 확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지금 당장이었다. 그들이 찾으러 올때까지 이곳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상황인데, 여기서 호로들의 말따나 굶어죽거나 피로로 죽는 것 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 호로들의 가장 위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새하얀 표범에게로 향했다. 이에 무슨짓을 할지 몰라 잔뜩 긴장하거나 분노해 이쪽으로 달려들려는 호로들을 눈짓으로 막으며 먼저 물음을 던진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였다. [──뭐지?] (곧 데리러 올거야.) 새파란 눈은 익숙하면서 동시에 낯설었다. 너무나 모순된 말이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좀 더 날것의 느낌. 조금도 정제되지 않은 사나운 그 기세는 정말 눈 앞에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맹수가 한마리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기에, 심호흡을 하며 띄엄띄엄 말을 골라 내뱉었다. 이쪽이 모르는 그의 모습에 주눅이 든데다 주변의 다른 호로들의 눈초리가 무서워져 어설프게 말끝이 흐려진다.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고 했지만, 역시 몸만 아이로 돌아간 것이 아닌 듯, 짧고 어눌해진 어조로 나온 문장에 스스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까지만, 같이.......) [이봐, 새끼 인간.] 기가 찬다는 듯, 말을 중간에 끊고는 콧바람을 훙훙 불며 고개를 든 그는 생각보다 몸집이 컸다. 입을 벌렸다 다물때마다 새하얀 이빨들이 가지런히 안쪽에서 빛을 낸다. 입자가 고운 모랫바닥을 밟으며 무어라 말하려 하는 그를 다시 입 다물게 한 것은 다음 아닌 이쪽이었다. (그림죠.) 이제는 너무나 작아진 손을 들어 그에게 뻗었다. 도중에 당장이라도 내쳐질 것 같았던 손은 의외로 어렵지 않게 그의 얼굴에 닿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차갑고 단단한 감촉임에도, 유려한 그 감촉이 좋았다. 주둥이가 슬쩍 벌어지며 그 사이로 날카롭게 돋아난 이빨들이 잠깐 보였다가 곧 사라진다. [────.] 정말 그림죠일까? 아주 조금 피어올랐던 의문은 금방 자취를 감췄다. 어느것 하나 그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사납게 치켜올라간 눈초리도. 조금의 불순물조차 없이 맑게 개인 새파란 눈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듯 뒤틀려진 입매도. 기분이 나쁠 때 혀를 차는 버릇도. 경계를 할 때는 시선을 떼지 않고 다가오는 버릇도. 그 모든것들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더없이 안도와 안정을 가져왔다. [따라오는 건 상관없지만, 책임은 안진다. 다른 호로들에게 찢겨도 알 바 아니야. 의식주도 알아서 해.] [잠깐, 그림죠. 정말 저 인간을 데리고 다닐 셈인가.] [데리고 다녀?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걸 냅두는 것 뿐이야. 배려할 필요도, 도와줄 생각도 없으니 알아서들 해.] 그 말을 끝으로 먼저 훌쩍 몸을 날려 앞으로 가버린 그를 보던 호로들 또한 하나 둘 몸을 돌렸다. 가까스로 묵인은 되었지만, 당장 어린아이의 보폭으로 저들의 뒤꽁무니조차 쫓기가 힘들어 이대로 낙오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던 그때, 옆에서 활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우리도 갈까.] 고개를 들고도 한참이나 올려다보아야 가까스로 보이는 역삼각형의 머리를 가진 호로가 꼬리를 뻗어 아까처럼 이쪽을 휘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쪽으로 놓아주며 다분히 즐거운 목소리로 신나게 말을 걸었다. [꼬리로 감고 움직이면 좀 귀찮아서 말야. 그런데 넌 어디서 왔어? 데리러 온다는 건 같은 인간? 아니면 사신이려나. 아까 그놈을 단번에 골로 보낸 건 네 힘이 아니지? ......그래도 역시 인간이라는 게 확실한데, 이렇게 맛있는 냄새는 처음 맡아본단 말이지. 사신들도 이정도로 정갈한 영압은 없었는데 말이야. 다들 네가 한입거리라도 됐으면 진즉 잡아먹었을걸. 지금 넌 너무 쪼끄매서 감질맛도 안날 것 같다고.]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과 대담에 가뜩이나 얼떨떨하던 머리는 더욱 느려지는 것 같았다. ...이쪽이 아는 '디로이' 를 잠깐 떠올려 보았지만, 이정도로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며 일단 제일 먼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주제로 말을 건넸다. (나, 태워줘도 괜찮아?) [뭐... 그림죠가 알아서 하랬잖아? 싫었다면 진즉 널 물어뜯었을 걸. 나도 이쪽 머리에 한번 당했는데, 꽤 아프다구 그거.] 그가 꼬리로 머리 한쪽을 긁적이며 조금 풀죽은 듯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는 것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쪽에서도 얼핏 보이는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눈 윗 부분에 움푹 패여진 그 상처는 아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이빨모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자, 빨리 가자. 그림죠는 발이 빨라서, 까딱하면 진짜 놓칠거야.]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작은 상처 또한 아닌 그의 흉터를 한참 바라보다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속도를 내며 고운 모래 위를 미끄러지듯 기어가는 그에게 매달려 무심코 뒤를 바라보았다. ......괜찮겠지. 어디에 있더라도 분명 와줄 사람들이 있으니. 그리고 그 어떤 이들보다도 먼저 이쪽으로 달려올 그를 떠올리며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에게 준비했던 선물을 안겨주는 것은 좀 더 이후의 일이 될 것 같다는 점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