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는 전쟁으로 인해 피난을 간 이들이 많아 마을에 빈집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제법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여느 또래들이 그랬듯이 그 빈집들 중 아무 집 하나를 골라 살고 있었다.

스스로를 지킬 힘조차 빠듯했고, 무자비한 천인들에게 대항하기는 더욱 어려웠던 상황이었다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기우뚱 했다.
정착하기에 여자 홀몸으로는 너무 버거운 곳이 아니었냐며,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의탁이라도 해보지 그럤냐는 말도 건네졌었다.

그곳에 자리잡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어차피 천인들이 한번 휩쓸고 간 지대였으며, 당연하게도 쑥대밭이 된 그곳에 천인들이 다시 올 이유는 조금도 없었기에.

다른 마을로 떠날 수는 있었다.
단지 여자 혼자 무턱대고 의탁을 원하기에 시대와 상황은 너무나 좋지 않았다.
성인식도 못치른, 그러나 너무 어리지 않은 소녀의 몸으로는 천인도, 같은 사람도 경계를 곤두세워야 했다.

그래서 머물렀다.
비록 식량을 구하기는 조금 힘든 곳이었지만, 충분히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이 있었고 식수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은 제법 있었기에,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집단을 이루어 드문드문 공동생활을 했다.
터전을 일구고, 일을 하고, 그렇게 식료품을 대가로 받으며 몇 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누나! 밖에 어떤 사람들이 찾아왔어!"





한동네에 살던, 그들 중 유난히 머리가 똑똑한 남자 아이가 내게 달려와 외쳤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천인이라는 가설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남자아이의 입에서 나온 '사람들' 이라는 단어는 늘 보던 천인들의 외양과는 동떨어져 있었기에.





".......긴토키. 그만 다른 곳으로 가지? 이 집 주인은 우리를 보고 싶지 않나 본데."

"어이, 어이. 우리가 여기서 문을 두드린 지 채 5분도 안 지났다고, 요녀석아."





문 틈 사이로 한순간 착각할 정도로 밝게 두드러지는 고운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남자와 먹색에 가까운 보랏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보였다.
그들의 복장으로 보아하니 분명 귀동냥으로 들어본 적 이 있던 '양이지사'의 옷차림.
은빛 곱슬 머리카락의 남자를 보고 일순 천인인가 싶었지만, 그의 옷차림을 또한 같았기에 안심했다.

굳게 닫아두었던 대문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끼이익, 낡은 나무가 비명을 지르자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던 두 남자의 몸이 이쪽으로 돌려졌다.




"봐라, 다카스기. 두드리면 열린다잖냐."

"그게 이럴때 쓰는 말이냐."

"어찌됐든 여기 집 주인 나오시면... 여자?"





짧게 틱틱거리던 둘 중 은발 남자의 시선이 이쪽으로 닿았다.
한순간 크게 벌어지는 붉은 눈동자가 그 남자가 조금 놀랐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이상했던지, 새까만 남자의 눈길 또한 이쪽으로 흘렀다.





"멍청아. 여자라고 해서 기대했잖아. 넌 꼬맹이한테도 여자라고 불러주냐?"





그리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동료에게 타박한다.
이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구는 그 모습에 은발 남자가 질린 기색으로 그와 내 쪽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첫만남에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쁜적은 처음이었다.
아무짓도 안했는데 한대 얻어맞은 느낌에 이쪽도 자연스럽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내 표정을 감지한 검은 남자의 시선이 다시 이쪽을 향했다.





"........"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우습게 뚫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는데, 그 기세가 무척 싸늘하면서도 사납다.
아마 분명 그의 눈꼬리가 유독 치켜올라가 있기에 전체적으로 인상을 한층 서늘하게 만든다는 것도 한 몫 할 터였다.
그런 몇 가지 점들만 빼고 본다면 어디도 흠잡을 곳이 없는 수려한 이목구비의 소유자였건만.

아무리 천인이 아닌 양이지사라 해도 별로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다.
새하얀 곱슬머리의 남자라면 모를까, 아직도 저리 날카로운 분위기를 퐁퐁 내뿜고 있는 저 남자는 왠지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어이, 꼬맹아. 네 부모님은 어디계시냐."





거친 말투에 낮고 묵직한 저음. 그것은 보랏빛 머리카락의 남자에게는 무척 잘 어울리는 음성이었다.
아마 외모를 제쳐두고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여심을 잡을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역시 그 좋은 목소리로 만들어내는 문장이 문제였다.

그렇기에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옆에서 아이고 머리야- 라는 표정을 하는 은발 남자와, 서늘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검은 남자를 번갈아 가리켰다.
입에서는 이미 머리를 거치지 않고 흘러나온 말이 완성되어 있었다.





"남말할 처지는 아닌것 같은데."

"......뭐?"





으악. 그의 눈길이 한층 험악해졌다.
표정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어째 천인들보다 훨씬 더 무서워 보였다.
이대로 달려들것만 같아 다급히 뒤로 물러나 문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닫아버렸다.





"너, 이 문 안 열어?!"

"큽...푸, 푸하하하하! 이거 천하의 다카스기 신스케가!
우리 부잣집 도련님이 아주 제대로 놀림받았구만~?
괜찮아, 괜찮아 170cm도 이 시대에서 작은 키는 아니니까....... 하하하!"

"닥쳐, 긴토키! 입 다물고 있어! ...이봐, 당장 열어!"





잠시 벙찐 얼굴에서 채 정신을 차린 것인지, 이내 닫힌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와 은발 남자인듯한 호탕한 웃음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그리고 보랏빛 머리카락의 남자로 추정되는 그 목소리가 다시 한번 사납게 문 너머로 내들렸기에 나는 문이 실수로라도 열리지 않게 온 몸에 힘을 주어 그 대문을 막았다.

아, 정말. 성격 한번 온순하네.
얼마나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건지, 이제는 덜컥이는 대문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우습지만, 그 일이 그와의 첫 시발점이었다.



대화 상대:다카스기 신스케
그에게 닿기까지 앞으로 29 %
GOOD:닿았다!

Writer : 우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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